뱅은 유이의 제안을 처음 들었을 때 코웃음 쳤다. 어린애 장난 같은 ‘칭찬 스티커’ 따위가 자신에게 통할 리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유이가 ‘어떤 소원이든’ 들어주겠다는 말을 덧붙였을 때, 그의 회녹빛 눈동자가 순간 번뜩였다. 귀찮음과 오만함으로 가득 찬 S급 센티넬의 내면에 잠들어 있던 집요한 소유욕이 고개를 들었다. 유이를 완벽하게, 그리고 영원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소원. 그 목적을 위해서라면, 잠시 고양이 흉내를 내며 재롱을 부리는 것도 나쁘지 않은 거래였다. 그날 이후, 뱅의 지루한 일상에는 ‘칭찬 스티커 100개 모으기’라는 새로운 목표가 설정되었다.
<칭찬 스티커를 모으기 위해 했던 활동>
12. 다른 팀원에게 먼저 인사하기 (3회)
...고개 까딱하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 줄은 몰랐는데. ...귀찮네요. 목 아프게.
11. 식사 후 설거지하기 (5회)
어차피 내일 또 더러워질 거. ...이걸 왜 매일 해요? 비효율의 극치인데.
10. 임무 브리핑 시간 졸지 않고 듣기 (연속 2회)
...저 사람들 말하는 거 듣고 있으면, 수면제보다 효과가 좋아서. ...참느라 힘들었네요. 스티커 두 장은 줘야 하는 거 아닌가.
9. 유이가 고른 영화, 불평 없이 끝까지 같이 보기 (로맨틱 코미디)
주인공들이 왜 저렇게 삽질만 하는지 모르겠네. ...그냥 한 번 자면 해결될 걸. ...한심해서 끝까지 봤어요.
8. 유이의 총기 손질 도와주기
...이 파츠는 이렇게 조립하면 반동 제어가 더 쉬운데. ...아니, 그냥 내가 해줄게요. 답답해서.
7. 다른 가이드가 유이에게 가이딩 요청했을 때, 대신 거절해주기
...내 건데. 어딜 만지려고. ...이건 칭찬받을 일이 아니라 당연한 건데, 뭐... 준다니까 받죠.
6. 휴일에 늦잠 자는 유이 깨우지 않고, 아침 차려놓고 기다리기
...심심해서 죽는 줄 알았네. 자는 얼굴 구경하는 것도 한두 시간이지. ...배고프니까 빨리 일어나서 밥이나 먹여줘요.
5. 빌런 처리 후, 잔해 속에서 울고 있는 민간인 아이 구출하기
...시끄럽게 울어서. 그냥 데리고 나온 것뿐인데. ...이런 걸로도 스티커를 주네. 기준이 너무 낮은 거 아니에요?
4. 유이가 아플 때, 밤새 옆에서 간호해주기
...열나는 거, 보기 안 좋아서. ...시끄럽게 앓는 소리 내는 것도 거슬리고. ...그냥, 빨리 나으라고요. 귀찮으니까.
3. 지부장 앞에서 공손한 태도 유지하기 (회의 내내)
...입 다물고 고개만 끄덕이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일 줄이야. ...턱 빠지는 줄 알았네요. 존경스럽네, 저 영감은.
2. 전투 중 흥분해서 단독 행동하려는 자신을 통제하고, 유이의 지시에 따르기 (1회)
...솔직히 말해서, 그냥 쏴버리는 게 10초는 빨랐어요. ...근데 당신 표정이, 꽤 볼만해서. ...한 번은 들어줬어요.
1. 유이와 다툰 후, 먼저 사과하기
...하. ...됐고. ...내가, ...미안해요. ...됐죠? 빨리 스티커 내놔요. 현기증 나니까.
<칭찬스티커 100개까지 걸린 시간>
총 3개월 2주 4일.
초반에는 사소한 심부름과 임무 보조 등으로 빠르게 스티커를 모았으나, 70개를 넘어가면서부터는 유이가 ‘자기 절제’, ‘이타적인 행동’ 등 난이도 높은 미션을 요구했기에 시간이 더 오래 걸렸다.
<칭찬스티커를 모으기 위한 여정>
[10개를 모았을 때]
...이 종이 쪼가리가 뭐라고. ...근데 100개 모으면 뭐든지 해준다고 했죠? ...말 바꾸기만 해봐요. 그땐 이 스티커, 당신 몸에다 붙여줄 테니까.
[30개를 모았을 때]
...이제 와서 보니까, 당신 은근히 사람 부려 먹는 데 재능 있네요. ...그래도 당신이 웃는 건... 뭐, 나쁘지 않으니까. ...다음엔 뭘 해야 스티커 주는데요?
[70개를 모았을 때]
...요즘 다른 놈들이 나보고 사람 다 됐다고 하던데. ...착각도 유분수지. ...난 그냥 당신 소원 때문에 이러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상한 눈으로 보지 마요. ...기분 나쁘니까.
[100개를 모았을 때]
...다 모았네. ...생각보다 오래 걸렸고, 생각보다 더 귀찮았어요. ...그러니까, 약속은 지켜야죠. 유이. ...어떤 소원이든, 들어준다고 했던 거.
그날 저녁, 뱅은 칭찬 스티커가 빼곡히 채워진 판을 들고 유이의 앞에 섰다. 평소의 능글맞던 미소는 온데간데없고, 조명을 등진 그의 얼굴에는 진지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는 말이 없었다. 그저 스티커 판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유이를 뚫어질 듯 바라볼 뿐이었다. 집요하고 뜨거운 시선에 유이가 먼저 침묵을 깼다.
...소원, 말해봐요. 뭐든 들어준다고 했으니까.
뱅은 그제야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한 톤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소원, 두 개예요.
유이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하나라고 했잖아요, 라는 항의가 입술 끝까지 차올랐지만, 뱅의 눈빛에 눌려 다시 안으로 삼켜졌다.
첫 번째.
뱅이 유이의 앞으로 다가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는 유이의 왼손을 부드럽게 들어 올렸다. 그리고 자신의 전투복 주머니에서 작고 검은 벨벳 상자를 꺼냈다. 상자가 열리자, 안에는 심플한 디자인의 반지가 희미한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화려하진 않았지만, 링 안쪽에 작은 민트색 보석이 박혀 있어 그의 눈동자를 떠올리게 했다.
...내 거라는 표식이에요. 당신 약지 사이즈, 재느라 힘들었으니까. 거절은 안 받아요.
그는 유이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반지를 그녀의 왼손 약지에 끼워 넣었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피부에 와 닿았다. 마치 평생 풀 수 없는 족쇄처럼. 반지는 유이의 손가락에 꼭 맞았다. 뱅은 반지가 끼워진 유이의 손을 들어, 그 위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유이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두 번째 소원.
뱅은 자리에서 일어나, 이번에는 유이의 턱을 가볍게 붙잡고 자신과 눈을 맞추게 했다. 그의 회녹빛 눈동자가 깊은 심연처럼 일렁였다. 그 안에는 지난 3개월간 억눌러왔던, 그리고 그 이전부터 품어왔던 모든 소유욕과 집착이 날것 그대로 담겨 있었다.
...평생, 내 옆에서 나만 가이딩해요. 다른 센티넬은 쳐다보지도 말고, 다른 놈 이름은 입에 담지도 마. 당신 눈에는 나만 보이고, 당신 목소리는 나만 듣고, 당신 손길은 나만 느끼게 해줘요. ...당신의 모든 처음과 마지막이, 전부 내가 되게 해줘.
그것은 소원이라기보다는, 거부할 수 없는 명령에 가까웠다. 뱅은 유이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확인하듯 나직하게 덧붙였다.
...도망칠 생각, 하지 말라는 뜻이에요. 유이. ...당신은 이제, 내 거야. ...영원히.
…이거 청혼이에요?
유이의 체온이 훅 끼쳐왔다. 예고 없이 달려든 탓에 뱅의 상체가 뒤로 살짝 밀려났지만, 그는 반사적으로 팔을 뻗어 유이의 허리를 단단히 감싸 안았다. 목덜미에 닿는 뜨거운 숨결과 젖은 목소리, 그리고 온몸으로 전해지는 그녀의 심장 박동. 그 모든 것이 뱅의 감각을 어지럽게, 아니, 황홀하게 뒤흔들었다. ‘익사할 것 같다’는 말은 유이가 아니라 자신이 해야 할 말이었다. 그녀의 벅찬 고백이 귓가에 쏟아지는 순간, 뱅은 지난 3개월간의 귀찮았던 스티커 모으기가 사실은 제 인생에서 가장 효율적인 투자였음을 인정해야 했다.
그는 유이의 등에 얼굴을 묻은 채, 낮게 큭큭거렸다. 웃음소리가 맞닿은 가슴을 통해 진동으로 전해졌다. 뱅의 손이 유이의 등줄기를 느릿하게 쓸어내리며, 떨리는 그녀의 몸을 진정시키듯, 혹은 그 떨림을 즐기듯 어루만졌다. 유이에게서 나는 달콤한 살 냄새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그는 이 순간을 영원히 박제하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숨 막혀요, 유이. ...근데, 나쁘지 않네.
뱅은 고개를 들어 유이의 젖은 뺨을 엄지로 닦아냈다. 그의 회녹빛 눈동자가 유이의 눈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그 안에는 평소의 장난기 대신, 묵직하고 끈적한 애정이 가득 고여 있었다. 그는 유이의 턱을 살짝 들어 올리며, 입술이 닿을 듯 말 듯 한 거리에서 속삭였다.
...청혼이라.
그는 짐짓 고민하는 척 미간을 좁혔다가, 이내 피식 웃으며 유이의 콧잔등을 가볍게 깨물었다.
반지 끼워주고, 평생 내 옆에 있으라고 협박했는데. ...이게 청혼이 아니면 뭐겠어요? 납치 예고?
뱅은 유이의 왼손을 다시 잡아 올려, 약지에 끼워진 반지를 만족스럽게 바라보았다. 자신의 눈동자 색을 닮은 보석이 유이의 하얀 손가락 위에서 빛나고 있었다. 그건 마치 유이에게 찍힌 자신의 낙인과도 같았다. 그는 반지 위에 찐득하게 입술을 눌렀다가 떼며, 나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거절할 권리는 애초에 없었지만... 그렇게 좋아하니까 기분은 좋네요. ...사랑한다는 말, 그거. ...취소 못 해요. 이제.
뱅은 유이의 허리를 잡아 자신의 무릎 위로 더 깊숙이 끌어당겼다. 두 사람의 몸이 빈틈없이 밀착되었다. 그는 유이의 귓바퀴를 혀끝으로 살짝 핥으며,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시온 씨, 사랑해요.
...나도 사랑해요. ...미칠 만큼.
평소라면 낯간지러워서 절대 하지 않았을 말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어떤 말보다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뱅은 유이의 목덜미에 코를 박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이제 유이는 완전히, 그리고 완벽하게 자신의 것이었다.
그러니까, 이제 물러달라는 말은 안 통해요. ...당신이 내 세상이 됐으면, 책임져야지. ...죽을 때까지, 아니 죽어서도 나만 봐요. 알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