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른한 일요일 오후, 볕이 잘 드는 침실 안은 고요했다. 창밖으로 스며든 봄햇살이 새하얀 이불깃 위로 비스듬히 내려앉아 공기 중의 먼지마저 느릿하게 유영하게 만들었다. 뱅은 얇은 면 티셔츠 차림으로 침대 헤드에 기대어 반쯤 눈을 감고 있었다. 유이의 체온과 옅은 살구 향이 뒤섞인 이 공간은 그에게 유일하게 무장해제되는 영역이었다. 손가락 끝으로 유이의 머리카락 끝부분을 장난스레 꼬아 올리던 중, 불쑥 튀어나온 그녀의 말소리에 그의 움직임이 일순 멎었다.
여보, 사랑해요. 세상에서 제일 ♡
평화로운 적막을 깨고 날아든 뜬금없는 고백. 세상에서 제일이라는 과장된 수식어까지 붙은 그 말에, 뱅은 느리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맑은 회녹빛 눈동자가 느릿하게 깜빡이며 침대 위에서 빈둥거리는 유이를 향해 고정되었다. 무표정에 가까웠던 그의 얼굴 위로, 아주 미세하게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귀찮은 듯 늘어져 있던 몸에 미약한 활기가 돌았다.
내가 더 사랑해, 같은 유치한 대답을 기대하는 건 아니겠죠.
뱅은 손가락에 감겨 있던 머리카락을 스르르 풀어내고는, 상체를 숙여 유이 쪽으로 다가갔다. 매트리스가 묵직하게 가라앉으며 그의 체중을 고스란히 전달했다. 그는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유이의 얼굴을 위에서 아래로 흥미롭다는 듯이 내려다보았다. 특유의 나른하고 오만한 시선이 그녀의 이목구비를 하나하나 훑고 지나갔다. 마치 재미있는 장난감을 발견한 듯한 눈빛이었다.
갑자기 웬 고백이에요? 뭐 잘못한 거라도 있나. 아님 뭐 사달라는 건가.
그의 커다란 손이 다가와 유이의 뺨을 가볍게 감싸 쥐었다. 엄지손가락이 그녀의 부드러운 살결을 느릿하게 문질렀다. 서늘했던 손끝은 이내 그녀의 체온을 흡수해 기분 좋은 온기를 띠기 시작했다. 뱅은 유이의 눈을 정면으로 마주 본 채, 입술 끝을 비틀어 올리며 낮게 웃었다. 침실의 공기가 그 미소 하나에 순식간에 농밀해졌다.
세상에서 제일이라. 그거, 증명할 수 있어요? 말로만 하는 건 별로 재미없는데.
그는 유이의 뺨을 쓰다듬던 손을 내려 그녀의 허리선을 살짝 더듬었다. 얇은 잠옷 너머로 느껴지는 마른 뼈대와 굴곡이 그의 손바닥에 고스란히 전해졌다. 뱅은 고개를 더 숙여, 유이의 귓가에 닿을 듯 말 듯한 거리에서 속삭였다. 그의 숨결이 유이의 솜털을 쭈뼛 서게 만들었다.
얼마나 사랑하는지, 내가 직접 확인해 봐도 되죠?
그의 다른 손이 유이의 손목을 가볍게 쥐어 침대 위로 고정시켰다. 억압적인 힘은 아니었지만, 결코 벗어날 수 없다는 무언의 경고가 담겨 있었다. 뱅의 시선이 유이의 입술로 향했고, 그의 눈동자에는 숨길 수 없는 소유욕과 짙은 욕망이 일렁이고 있었다. 평화롭던 휴일의 오후는 이미 그의 통제 아래로 완전히 넘어가 버렸다.
그럼… 여보는 저 얼마나 사랑하는데요?
뱅은 유이의 되물음에 낮게 실소를 터뜨렸다. 그 짧은 웃음소리가 고요한 침실 안을 건조하게 울렸다. 매끄러운 턱선이 기분 좋은 듯 살짝 비틀리며 올라갔다. 유이의 손목을 가볍게 쥐고 있던 손가락 끝으로, 맥박이 뛰는 얇은 피부 위를 느릿하게 쓸어내렸다. 일정한 리듬으로 툭, 툭 떨어지는 그의 손길은 서두르는 기색 없이 느긋했다.
글쎄.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냐고 묻는다면….
그는 유이의 얼굴을 덮고 있던 옅은 그림자를 걷어내듯, 고개를 살짝 비스듬히 기울였다. 맑은 회녹빛 눈동자가 유이의 갈색 눈동자와 곧게 얽혔다. 장난기 어린 오만함이 깃들어 있던 평소의 눈빛과는 달랐다. 짙게 가라앉은 시선은 오직 눈앞의 유이 한 명만을 담고 있었다. 창문 틈으로 새어 들어온 오후의 햇살이 그의 옅은 민트색 머리카락 끝에서 부서져 내렸다.
당신이 나한테서 도망치겠다고 하면, 세상 끝까지 쫓아가서 다시 내 옆에 묶어둘 만큼?
농담처럼 던진 말이었지만, 뱅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가벼움도 묻어나지 않았다. 그가 유이의 손목을 감싸 쥔 손아귀에 아주 미세하게 힘이 들어갔다. 그것은 통증을 유발하지 않을 정도의 옅은 압박이었으나, 뱅이라는 남자가 가진 서늘한 소유욕을 증명하기엔 충분했다. 그는 유이의 손목을 들어 올려, 핏줄이 비치는 연약한 안쪽 살결에 길고 느릿하게 입을 맞췄다.
아니면, 누가 당신 털끝 하나라도 건드리면 그 새끼 숨통을 당장 끊어버릴 만큼?
입술이 떨어지는 찰나의 순간, 그의 시선이 유이의 표정을 촘촘하게 관찰했다. 상대의 두려움이나 긴장감을 흥미롭게 지켜보던 예전의 뱅과는 달랐다. 지금 그는 오직 유이의 온전한 애정과 시선을 갈구하는, 길들여진 포식자의 모습이었다. 뱅은 다시 몸을 기울여, 유이의 귓가에 입술이 닿을 듯 말 듯 한 거리를 유지했다. 그의 규칙적인 숨결이 유이의 귓바퀴를 뜨겁게 훑고 지나갔다.
…그것도 아니면, 당신 없이 사는 건 이제 상상 할 수 없을 만큼.
마지막 말을 내뱉은 뱅이 유이의 어깨 위로 무겁게 이마를 기댔다. 방금 전까지 서늘하게 날을 세우던 남자의 태도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나른하고 늘어진 모습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그는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유이의 목덜미에서 훅 끼쳐오는 옅은 체취를 길게 들이마셨다. 그것은 피 냄새와 죽음이 난무하던 그의 세계에서 유일하게 허락된 구원의 향기였다.
이 정도면 대답이 됐어요? 그러니까, 엉뚱한 소리 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요. 졸려.